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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반란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양이현정 옮김/현실문화연구/11000원

대학시절 읽었던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남자가 멘스를 한다면"은 (브레히트의 "상어가 사람이라면"이라는 글과 함께) 내 뒷통수를 강하게 내리친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충격은 나를 둘러싼 단단한 인식의 외피에 균열을 내기에 충분했다. 그 무렵의 나는 비로서 "나"라는 자아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였으며, 별다른 고민없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아직도 나는 스타이넘의 글을 읽으며 공감보다는 부끄러움을 많이 느낀다. 가진 자의 일상이란 것이 그러하듯,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통념과 관습의 외피 안에 적당히 안주하기만해도 별다른 양심의 가책 없이 이득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게을러빠진 기득권 남성에게는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 페미니스트가 옆에 한 명 있어야 하건만.. ^^;

책에 실린 여러 글들 중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은 글 "트랜스젠더 : 신발이 맞지 않으면 발을 바꿔라"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 글을 읽다보면 그들의 성전환을 과연 성적 정체성을 찾는 일로 옹호하고 박수치는 것만이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사회가 고정된 성 정체성을 강요할 때, 그런 사회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육체를 바꾸는 것만이 과연 유일한 탈출구일까? 신발이 맞지 않는다고 발을 바꿔버리는 우를 범하는건 아닐까? 오히려 그들의 '적응'이 사회의 고정된 성적 통념을 더욱 고착화 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리수의 경우처럼, 고정된 성 정체성을 강요하던 사회가 "여성이 된 남성"에 호의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닌게 아니라, 하리수가 등장했을 때 우리 사회가 트랜스젠더들을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긍정적으로 판단했었는데, 좀 더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외에도 페미니즘에 눈 떠 가는 스타이넘의 인식 변화가 돋보이는 "선거 운동", 음식과 권력의 문제를 다룬 "음식의 정치학" 등이 기억에 남는다. 번역이 조금 매끄럽지 못하지만 시간을 두면서 찬찬히 읽어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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