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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환상

다니엘 부어스틴 지음/정태철 옮김/사계절/15800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예를 들어, 카우치라는 그룹이 TV 생방송 도중에 자신의 성기를 카메라 앞에 그대로 드러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우리?약 1주일을 이 사건과 관련된 보도들의 홍수 속에 살아가야 했다. 그 쏟아진 보도들이 만약 동어반복(사건 자체를 계속 보도하는 것)으로 점철되었다면, 우리는 이내 흥미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흥미를 잃은 기사는 더 이상 보도가치를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기사 역시 1주일 동안이나 반복될 리가 없다. 태초의 사건에 사람들이 흥미를 잃을 즈음, 카우치라는 그룹이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공연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이어 홍대 앞 클럽 주인의 인터뷰가 나오고, 홍대 앞 공연에서 성기노출이 빈번하게 있었다는 '제보'가 잇따른다. 사람들은 언론으로부터 눈을 뗄 틈도 없이 쏟아지는 '사건'들 속에 즐거워한다. 아니, TV 스위치를 켜는 순간, 우리는 쏟아지는 사건들을 이미 기대하고 있다.

이 쏟아지는 사건들 속에 진짜 사건은 하나다. 성기 노출. 그냥 어떤 개념 없는 애들이 한 번 튀어보겠다고 TV 앞에서 벗었다. 그게 다다. 어떤 사람들은 피식 웃고,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내고, 어떤 사람들을 그냥 잊는다. 하지만 다음날 이 사건은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나고, 그 다음 날은 새로운 사건으로 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사건들을 이 책에서는 "가짜(pseudo) 사건"이라고 부른다. '가짜'라는 말이 '거짓'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사'라는 번역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 가짜 사건들은 실제 벌어져서 사건이 된 것이 아닌, 보도되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사건, 혹은 보도되기 위해 태어난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가짜 사건'은 '거짓 사건'이 아니다. 거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짜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 사건들은 우리에게 '진짜' 실제 세계를 보여주기보다는, 세계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대개의 가짜 사건들은 아주 화려하고 극적이다. 오히려 진짜 사건들이 단순하고 평범하기 쉽다. 때문에 사람들은 진짜 사건에는 금방 싫증을 느끼지만, 가짜 사건에는 열광한다. 때로는 기사가 너무 선정적이라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TV를 켜거나 인터넷에서 뉴스 포털을 찾을 때면 우리는 뭔가 자극적인 사건이 우리를 맞아주길 기대한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가짜 사건을 통해 인식하는데 익숙해지는데, 그 결과 우리 생각 속에서 세상은 거대한 가짜 사건들의 복합체로 남게 된다. 심지어 진짜 사건들조차 가짜 사건들처럼 인식되고 받아들여진다.(이라크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는 기사를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어느 회사가 홍보를 위해 누드 전시회를 기획했다는 기사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가?) 결국 우리는 세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인식하게 된다.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어느새 우리의 인식을 대체한 것이다.

9.11 테러 직후 부시가 미국이 공격을 받은 것은 적들이 미국의 부와 자유와 이상을 시기하기 때문이라는 연설을 했을 때, 나는 미국인들이 정말 저 말을 믿을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미국인들이 그 말을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저런 집단 최면(?)이 가능한지 궁금했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의 힘이다. 이제 사람들은 광고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인식하고, 후보의 이미지를 정치적 선택의 근거로 삼는다.(선거 운동이 후보의 이미지 대결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들이 원하는 이미지로 자신을 꾸미고 세계를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실제 세계는 신경쓰지 않고 자신들의 환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매트릭스처럼. 하지만 우리를 이미지의 세계에 묶어두는건 기계들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날카로운 책이 쓰여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40여년 전인 1961년이다. 저자는 이미지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는 당시 미국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지만, 지금의 우리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듯한 뜨끔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저자 자신의 시각은 약간 귀족적 혹은 엘리트주의라고 할 정도로 보수적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분석이 가지는 날카로운 현실 인식이 무뎌지는 것은 아니다. 책이 전반적으로 너무 길다면 1장만 읽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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