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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영웅들

Thomas Brussig 지음/허영재 옮김/유로/9000원

요즘, "영웅"이 진짜 영웅스러운 텍스트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20여년 전에는 분명, 세상은 영웅들의 것이었다. 한쪽 세계는 마블 코믹스와 헐리웃이 만들어낸 강력한 힘의 영웅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다른 쪽 세계도 사회주의 전사 영웅들의 거룩한 투쟁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반작용일까. 냉전의 종식과 함께 영웅들은 사라지거나, 혹은 인간이 되었다. 교조적인 영웅 이야기는 비웃음을 받기 마련이고, 헐리웃의 영웅들도 "인간적인 고뇌"라도 보여주지 않으면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고 있지 않은가.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이 책에 "영웅"이라는 단어는 단 한번 등장한다. 게다가, 철저한 비웃음이다. 자신들이 사회주의 사회의 이상을 위해 헌신한 평범한 "영웅"들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쳐주는 콧방귀 같은 느낌으로. 동독 사회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이거 왠지 불편하다. 아무리 그가 "전후세대"에 속한다 하더라도, 즉 나치독일의 죄과와 사회주의 독일의 건설로부터 자유롭다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허물을 이토록 비웃기만 한다는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

차라리 이문열은, 자신의 일그러진 영웅의 몰락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영웅이라는 "권력"은 타자였으나, 본인 역시 그 권력을 구성하던 한 부분이었음을, 결코 권력 그 자신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 아니었을까.(확실히 이 시절의 이문열은 지금보다 훨씬 빛났다) 물론 이 깨달음이 반성적 성찰로 이어지느냐 역사적 망각으로 이어지냐의 선택이 남아 있긴 하지만, 비꼼과 비웃음으로는 그런 선택의 기회조차 주지 못한다.

문학적으로도,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한 전개가 이어지다가 마지막 장에 가서 갑작스래 목소리를 높이는 작가의 모습이 껄끄럽게 느껴진다. 시종일관 과대망상증을 보이던 화자가 갑자기 너무 똑똑해지는건, '조국'의 배반(호네커를 살리기 위해 그를 거의 죽이려 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급작스럽지 않은가. 이래저래 돌려서 뜻을 전달하려다가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작가는 주인공의 몸 속에 빙의라도 하기로 결심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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