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아리엘 도르프만 외 지음/김성오 옮김/새물결/13000원
칠레의 아옌데 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선 다큐멘터리 영화 "칠레전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속에 묻어나던 자랑스러움과 자긍심은 아마도 우리네 선배들이 87년 6월 항쟁의 거리에서 느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요,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를 살해하고 자신들의 민중 정부를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심정은 또한 80년 광주학살을 지켜보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첩되는 기억은 비단 민중의 모습만이 아니다. 항상 고상한 척 질서와 비폭력을 강조하는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태로워지는 바로 그 순간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을 자행하는 자로 돌변한다는 사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이 책은 짧았던 아옌데 정권 기간, 키만투라는 정부 산하 출판 조직을 통해 펼쳐낸 일련의 의식 개혁 운동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아옌데 정권 이전의 칠레 정치/경제/문화는 철저하게 미국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때문에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개혁 과정에서 이러한 문화적 종속성을 타파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제였다. 그 중에서도 디즈니의 만화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상을 설파하고 제 3세계의 아이들(즉, 자라나 제 3세계의 민중이 되는)로 하여금 스스로를 타자화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더더욱 피해갈 수 없는 주제였으리라.(물론 만약 우파가 디즈니의 만화를 이용하여 아옌데 정부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 책도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 ) 어쨌거나 이 책으로 인해 당시 칠레에서는 도널드 덕이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아이콘처럼 되어버렸는데, "순수"의 이름으로 디즈니를 옹호한 이들이 바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지지한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 일찍 방영하던 만화동산의 열렬한 애청자였던 나로서는 이 책에서 벗겨내는 도널드 덕의 가면은 꽤나 신선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세계는 실은 기이한 가족관계와 제3세계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찬 도착적 세계였음을 재발견할 수 있는데, 그 세계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만화라는 형식의 덕이 컷을 것 같다. 여기에는 만화는 아이들의 세계라는, 때문에 순수한 영역이라는 환상이 한 몫을 한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면을 벗겨내면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른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아동문학 비평의 핵심적 주제가 드러나는데, 아동문학의 생산자는 어른일 수밖에 없으며 어떤 형식으로든 어른의 가치관이 투사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수행하는 디즈니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아동 문학이 결코 당연하게 "아동"들의 세계는 아님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한 깨달음이 아닐까.
사실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텍스트만이 유의미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정치적인 올바름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오늘날 어느 대중 매체의 텍스트가 이러한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때문에 디즈니에 대한 이 책의 해석에 대해서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버가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고, "왜 꼭 짚어서 디즈니냐"라는 항변도 가능할 것이다.("왜 하필 나만.." 이라는 류의 변명은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아저씨부터 성희롱 발언으로 지탄받는 어느 대학 교수까지 폭넓게 애용하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보통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후렴구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우선 디즈니는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고, 둘째로 텍스트 자체의 문제를 넘어서는 현실권력 관계, 즉 문화 제국주의라는 논점에 비추어볼 때 디즈니의 죄과는 유독 무겁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문화 제국주의의 가장 큰 병폐는 그 문화를 수용하는 제3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타자화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압도적인 자본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문화는 매끈한 세련미로 치장하여 사람들을 능수능란하게 무장해제 시키는데, 그렇게 무장해제된 사람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텍스트의 시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백인의 눈으로 유색인을 보고, 남성의 눈으로 여성을 보고, 미국의 눈으로 제3세계를 보는 것이다. 미국 문화의 전파자들은 항상 문화의 교류(단어 자체는 쌍방향적이지만, 실은 단방향으로 주입된다)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데, 제3세계의 민중들은 결국 저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데에도 나름의 고통과 고난, 슬픔이 있다는 사실 정도를 이해하게 될 뿐이다. 저항은 순화되고, 지배는 영속화된다.
디즈니는 바로 그 전형이다. 디즈니의 만화에 등장하는 제3세계는 순진한 원주민이거나 잔인한 테러리스트들 뿐인데, 도널드가 원주민들로부터 금은보화를 가져가는 것은 보물의 가치를 모르는 원주민들의 증여요, 테러리스트들을 혼내주는 것은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단어를 대체하자면, 미국이 제3세계로부터 부를 가져가는 것은 제3세계 사람들이 그 부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요, 제3세계와 전쟁을 하는 것은 그들이 나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세계인 만화는 정치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이 '순수'해야 한다고? 디즈니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 변명이야 말로, 디즈니가 공격받아야 하는 이유 그 자체가 된다.
물론, 이제 한국에서 디즈니의 만화들은 더 이상 주류라고 할 수가 없다. 외형상 충무로의 영화들은 헐리웃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소비되는 미국 문화에서도 사람들은 디즈니보다는 디즈니의 캐릭터들을 비웃는 슈렉에 열광했다. 아직도 미국 문화의 강력한 자장 안에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독립성을 갖추기 시작한 오늘날,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동남아에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의 문화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적한 박노자 교수의 글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화 교류의 일방성과 내용(박노자 교수의 지적처럼,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사실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 상류층의 '세련된' 소비생활이 아닐까)을 볼 때, 한류는 진정한 의미의 문화 교류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류를 다루는 신문 기사들 역시 그 안에 우월감과 경제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주판 소리만 요란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어느 틈에 우리 자신이 또 다른 도널드 덕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서술에 중간 중간 들어가있는 삽화로 인해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중심 주제와는 별개로, 책 서두의 서문에서는 디즈니 월드의 만화 제작 방식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으며, 끝부분의 '공정사용'과 관련된 글에서 다루는 저작권을 둘러싼 법정 논쟁(비판/비평을 위해 만화를 무단전제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인가?)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디즈니 만화를 보던 자신을 떠올리며 책을 읽는다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