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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05 Archives

July 5, 2005

식물의 역사와 신화

Jacques Brosse 지음/양영란 옮김/갈라파고스/15800원

원제목은 다른 것 같지만('식물의 마법' 정도일까.. 불어라서 정확히는 모르겠다 -_-), 이 책은 정말 제목 그대로 "식물의 역사"와 "식물의 신화"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크게 2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식물의 기원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다루며, 후반부는 인간이 식용으로(마약 포함) 사용하는 식물들을 둘러싼 신화와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책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주제 의식으로 묶인다는 느낌은 주지 못한채, 이러저러한 지식 습득 정도의 의미만을 남기는 것 같다.

식물의 역사를 다룬 책의 전반부는 다소 지루한 느낌을 준다. 물론 과학적 지식을 접할 때 경외감과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다를 수 있겠지만, 내게는 인간의 역사와 결부된 후반부의 스토리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다만 여러 식물들 중 마약류의 식물들을 먼저 다룬 것은 학문적 고려보다는 다분히 선정적 의도가 있지 않았나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아쉬운 점은, 식물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글로만 묘사된 식물의 모양새를 읽고 실제 모습을 상상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점이다. 저자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면, 옮기는 과정에서 좀 더 친절한 보조자료 첨부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책으로 인해 길가의 들풀에 눈길을 한 번 더 주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

July 9, 2005

지구영웅전설

박민규 지음/문학동네/7500원

역시 박민규였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는데, 이 책의 주제는 직전에 읽은 "도널드 덕..."과 일맥상통한다. 같은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누구는 핏대 세우며 악을 써야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이처럼 경쾌하고 재치있게 풀어놓는걸 보자면 배가 살짝 아프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게 박민규의 매력 아닌가.

미국 만화의 영웅들이 미국 자신의 알레고리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각각 미국의 여러 측면들을 대변하는데, 즉 슈퍼맨은 힘이고, 배트맨은 자본이며, 원더우먼은 문화, 아쿠아맨은 네트워크다. 그리고 주인공인 바나나맨은 겉은 노랗지만 속은 흰 유사 백인으로 이들 영웅들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지만, 하는 일이라고는 이들에게 빅맥이나 사다주는 들러리일 뿐이다. 빙고!

우리 주변에도 보면 잘 살려면 일단 미국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래봤자 결국 햄버거 심부름이나 하는게 아닐까? 물론 미국은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우린 친구야 바나나맨"

July 16, 2005

조그만 입술

마누엘 푸익 지음/송병선 옮김/책세상/6900원

마누엘 푸익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작가소개 란의 "거미 여인의 키스"라는 제목 하나만으로 이 책을 냉큼 집어들었다. 책으로는 읽지 못했지만, "거미 여인의 키스"는 매우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였다. 그만한 글을 쓴 작가라면,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해주지 않을까?

좋은 선택이었지만, 읽고 난 소감은 좀 애매하다. 무엇보다, 라틴 문학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인지 많은 것을 놓치면서 읽었다.(역자 해설 격인 작가 (가상) 인터뷰가 아니였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들이 많다) 탱고를 떠올리며 읽은 것도 아니고, 등장인물들의 망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이런, 한국 근대사라곤 전혀 모르면서 "토지"를 읽은 격 아닌가.

가만 보면 라틴 문학은 세계 문학의 보물창고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보르헤스, 마르케스, 푸익 같은 묵직한 작가들부터 세풀베다나 코엘료 같은 나름대로 트렌디한 작가들까지 꽤 유명한 작가들이 많지 않은가. 허나, 그들의 작품을 읽는 우리에게 작품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라틴 아메리카는 생소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책을 얼마만큼이나 이해하면 읽는 것일까.

July 22, 2005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문학동네/9500원

박민규의 특이한 동물 취향은 그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맺음말에서 해마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을 때부터 익히 알아봤던 일이다. 이 단편집에서 그는 종종 그 낯선 동물을 일상 속에 배치함으로써 생겨나는 이질감을 활용한다. 어느 영화인지 M/V 인지, 텅 빈 지하철 한켠에서 눈물을 흘리던 여인이 고개를 들자 커다란 개미가 외롭게 앉아있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생뚱맞은 장면이 오히려 여인의 외로움을 절실히 표현해주던 걸 본 적이 있다. 이 소설들에서도, 비슷한 상상력이 작용하고 있는걸까.

어쨌거나, 몇몇의 소설은 상상력이 지나쳐 오히려 혼란스럽다. 뭔가 표현하고자 하는게 있는 것은 같은데, 내 머리로는 그게 잘 캐치가 안된다. 이런 경우 독자를 탓해야하나, 작가를 탓해야하나. 그의 비유를 따라가지 못하던 내게는 마지막 "갑을고시원 생존기" 같은 직설적(?) 글이 편하고 인상깊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하철 플랫폼 벤치에 앉아있는 기린은 꼭 만나보고 싶다. 그 슬픈 눈을 들여다보면 나라도 인사하지 않을까. 아, 기린입니까.

July 31, 2005

우리 같은 영웅들

Thomas Brussig 지음/허영재 옮김/유로/9000원

요즘, "영웅"이 진짜 영웅스러운 텍스트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20여년 전에는 분명, 세상은 영웅들의 것이었다. 한쪽 세계는 마블 코믹스와 헐리웃이 만들어낸 강력한 힘의 영웅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다른 쪽 세계도 사회주의 전사 영웅들의 거룩한 투쟁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반작용일까. 냉전의 종식과 함께 영웅들은 사라지거나, 혹은 인간이 되었다. 교조적인 영웅 이야기는 비웃음을 받기 마련이고, 헐리웃의 영웅들도 "인간적인 고뇌"라도 보여주지 않으면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고 있지 않은가.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이 책에 "영웅"이라는 단어는 단 한번 등장한다. 게다가, 철저한 비웃음이다. 자신들이 사회주의 사회의 이상을 위해 헌신한 평범한 "영웅"들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쳐주는 콧방귀 같은 느낌으로. 동독 사회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이거 왠지 불편하다. 아무리 그가 "전후세대"에 속한다 하더라도, 즉 나치독일의 죄과와 사회주의 독일의 건설로부터 자유롭다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허물을 이토록 비웃기만 한다는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

차라리 이문열은, 자신의 일그러진 영웅의 몰락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 영웅이라는 "권력"은 타자였으나, 본인 역시 그 권력을 구성하던 한 부분이었음을, 결코 권력 그 자신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 아니었을까.(확실히 이 시절의 이문열은 지금보다 훨씬 빛났다) 물론 이 깨달음이 반성적 성찰로 이어지느냐 역사적 망각으로 이어지냐의 선택이 남아 있긴 하지만, 비꼼과 비웃음으로는 그런 선택의 기회조차 주지 못한다.

문학적으로도,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한 전개가 이어지다가 마지막 장에 가서 갑작스래 목소리를 높이는 작가의 모습이 껄끄럽게 느껴진다. 시종일관 과대망상증을 보이던 화자가 갑자기 너무 똑똑해지는건, '조국'의 배반(호네커를 살리기 위해 그를 거의 죽이려 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급작스럽지 않은가. 이래저래 돌려서 뜻을 전달하려다가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작가는 주인공의 몸 속에 빙의라도 하기로 결심했나보다.

July 7, 2005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아리엘 도르프만 외 지음/김성오 옮김/새물결/13000원

칠레의 아옌데 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선 다큐멘터리 영화 "칠레전투"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속에 묻어나던 자랑스러움과 자긍심은 아마도 우리네 선배들이 87년 6월 항쟁의 거리에서 느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요,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를 살해하고 자신들의 민중 정부를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심정은 또한 80년 광주학살을 지켜보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첩되는 기억은 비단 민중의 모습만이 아니다. 항상 고상한 척 질서와 비폭력을 강조하는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태로워지는 바로 그 순간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을 자행하는 자로 돌변한다는 사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이 책은 짧았던 아옌데 정권 기간, 키만투라는 정부 산하 출판 조직을 통해 펼쳐낸 일련의 의식 개혁 운동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아옌데 정권 이전의 칠레 정치/경제/문화는 철저하게 미국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때문에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개혁 과정에서 이러한 문화적 종속성을 타파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제였다. 그 중에서도 디즈니의 만화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상을 설파하고 제 3세계의 아이들(즉, 자라나 제 3세계의 민중이 되는)로 하여금 스스로를 타자화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더더욱 피해갈 수 없는 주제였으리라.(물론 만약 우파가 디즈니의 만화를 이용하여 아옌데 정부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 책도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 ) 어쨌거나 이 책으로 인해 당시 칠레에서는 도널드 덕이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아이콘처럼 되어버렸는데, "순수"의 이름으로 디즈니를 옹호한 이들이 바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지지한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 일찍 방영하던 만화동산의 열렬한 애청자였던 나로서는 이 책에서 벗겨내는 도널드 덕의 가면은 꽤나 신선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세계는 실은 기이한 가족관계와 제3세계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찬 도착적 세계였음을 재발견할 수 있는데, 그 세계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만화라는 형식의 덕이 컷을 것 같다. 여기에는 만화는 아이들의 세계라는, 때문에 순수한 영역이라는 환상이 한 몫을 한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면을 벗겨내면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른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 지점에서 아동문학 비평의 핵심적 주제가 드러나는데, 아동문학의 생산자는 어른일 수밖에 없으며 어떤 형식으로든 어른의 가치관이 투사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수행하는 디즈니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아동 문학이 결코 당연하게 "아동"들의 세계는 아님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한 깨달음이 아닐까. 

사실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텍스트만이 유의미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정치적인 올바름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오늘날 어느 대중 매체의 텍스트가 이러한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때문에 디즈니에 대한 이 책의 해석에 대해서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버가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고, "왜 꼭 짚어서 디즈니냐"라는 항변도 가능할 것이다.("왜 하필 나만.." 이라는 류의 변명은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아저씨부터 성희롱 발언으로 지탄받는 어느 대학 교수까지 폭넓게 애용하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보통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후렴구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우선 디즈니는 지나치게 노골적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고, 둘째로 텍스트 자체의 문제를 넘어서는 현실권력 관계, 즉 문화 제국주의라는 논점에 비추어볼 때 디즈니의 죄과는 유독 무겁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문화 제국주의의 가장 큰 병폐는 그 문화를 수용하는 제3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타자화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압도적인 자본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문화는 매끈한 세련미로 치장하여 사람들을 능수능란하게 무장해제 시키는데, 그렇게 무장해제된 사람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텍스트의 시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백인의 눈으로 유색인을 보고, 남성의 눈으로 여성을 보고, 미국의 눈으로 제3세계를 보는 것이다. 미국 문화의 전파자들은 항상 문화의 교류(단어 자체는 쌍방향적이지만, 실은 단방향으로 주입된다)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데, 제3세계의 민중들은 결국 저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데에도 나름의 고통과 고난, 슬픔이 있다는 사실 정도를 이해하게 될 뿐이다. 저항은 순화되고, 지배는 영속화된다. 

디즈니는 바로 그 전형이다. 디즈니의 만화에 등장하는 제3세계는 순진한 원주민이거나 잔인한 테러리스트들 뿐인데, 도널드가 원주민들로부터 금은보화를 가져가는 것은 보물의 가치를 모르는 원주민들의 증여요, 테러리스트들을 혼내주는 것은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단어를 대체하자면, 미국이 제3세계로부터 부를 가져가는 것은 제3세계 사람들이 그 부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요, 제3세계와 전쟁을 하는 것은 그들이 나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세계인 만화는 정치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이 '순수'해야 한다고? 디즈니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 변명이야 말로, 디즈니가 공격받아야 하는 이유 그 자체가 된다. 

물론, 이제 한국에서 디즈니의 만화들은 더 이상 주류라고 할 수가 없다. 외형상 충무로의 영화들은 헐리웃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소비되는 미국 문화에서도 사람들은 디즈니보다는 디즈니의 캐릭터들을 비웃는 슈렉에 열광했다. 아직도 미국 문화의 강력한 자장 안에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독립성을 갖추기 시작한 오늘날,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동남아에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의 문화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적한 박노자 교수의 글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화 교류의 일방성과 내용(박노자 교수의 지적처럼,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사실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 상류층의 '세련된' 소비생활이 아닐까)을 볼 때, 한류는 진정한 의미의 문화 교류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류를 다루는 신문 기사들 역시 그 안에 우월감과 경제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주판 소리만 요란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어느 틈에 우리 자신이 또 다른 도널드 덕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서술에 중간 중간 들어가있는 삽화로 인해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중심 주제와는 별개로, 책 서두의 서문에서는 디즈니 월드의 만화 제작 방식에 대한 비판을 볼 수 있으며, 끝부분의 '공정사용'과 관련된 글에서 다루는 저작권을 둘러싼 법정 논쟁(비판/비평을 위해 만화를 무단전제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인가?)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디즈니 만화를 보던 자신을 떠올리며 책을 읽는다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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