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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귄 지음/최용준 옮김/Gryphon Books/11000원

어떻게 보면 이 책에 실린 상당수의 단편들은 '땅바다(어스시 -_-)' 시리즈나 '헤인' 시리즈의 외전 격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그 방대한 세계에 기대지 않더라도 각각의 단편들은 그 자체로 충만해 보인다. 앞쪽의 단편들에서는 초기작다운 풋풋함도 엿보이지만, 역시나 그녀의 정신세계가 녹록치 않은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르귄은 SF 작가로 분류되지만, 그녀의 작품은 SF를 하나의 상상력의 도구로 차용할 뿐이다. 판타지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에서는 은폐되어 있는 모순을 아주 쉽게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르귄은 이 모순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개개인과 그를 둘러싼 관계의 문제를 다룬다. 대중문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SF 소설이지만, 그녀의 소설이 왠만한 순수문학 못지 않은 철학적 깊이를 가지는 이유다.

"파리의 4월"은 약간 성글지만 미소를 짓게 하는 낭만(?)적 상상력으로, "아홉 생명"과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관계의 문제에 대한 깊은 고찰으로, 그리고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혁명 전날"은 그녀가 꿈꾸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헌사로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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