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들
어슐러 K. 르귄 지음/이수현 옮김/황금가지/12000원
우라스와 아나레스.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이 두 쌍둥이 별은 각자 자신만의 사회 체제를 유지한채 마주하고 있다. 150년 전 우라스의 아나키스트들(소설 속에서는 오도니안이라 불린다)이 이주하여 아나키즘 사회를 건설한 아나레스는,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힘겹게 싸우고 있는 곳이다. 반면 우라스는 풍족한 자연환경을 현명하게 유지하며 자연과 조화된 발전을 이루지만, 사회 자체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제3세계에 대한 억압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이다. 이 두 별은 서로를 철저하게 무시하며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다. 소설이 아나레스의 우주항을 둘러싼 "벽"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소설의 핵심 주제가 이 벽으로 상징되는 "단절"임을 잘 보여준다.
쉐벡이 우라스로 간 것은 바로 이 단절의 벽을 허물고자 하는 시도였다. 아나레스와 우라스를 시점을 달리하여 교차하여 보여주는 구성은 양쪽 사회를 모두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비록 작가가 아나레스에서 희망을 발견하긴 하지만, 우리는 양쪽 세계 모두가 불완전하며 결함을 가진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아나레스에서는 알게 모르게 싹트는 관료주의의 위험이, 우라스에는 가진 자가 빼앗긴 자들을 짖밟고 올라서는 야만이. 아나레스의 희망은 그 결함이 깨어지지 않을 정도로 공고해지지 않았다는 이유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불완전한 두 세계는 서로를 거울로 삼아 스스로를 반추해 볼 때 비로서 발전할 수 있었다. 단절은 그 반성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할 뿐이었다.
소비에트가 붕괴했을 때, 공산주의의 몰락이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한 것이라는 유치한 논리비약이 횡행하고 있을 때,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슬퍼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결코 소비에트 체제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다른 세계"의 존재가 우리 사회를 풍족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비에트의 몰락으로 자본주의의 야만성이 브레이크를 잃을 것이라는 그들의 슬픈 예감은 오늘날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아직 분단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남과 북은 마음의 빗장을 굳게 닫은채 서로를 괴물이라 헐뜯고 있다. 이런 사회, 국가보안법 하나 없애기도 쉽지 않은 이 사회에서, 북을 우리를 비출 수 있는 거울로 인정하자는 것은 아직 힘든 요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절은 자기 안의 모순만을 키워나갈 뿐이다. 너무 늦기 전에, 남과 북이 서로에게 눈감지 않고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배우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