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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원시의 삶

미셸 투르니에 지음/이원복 옮김/좋은벗/7000원

미셸 투르니에의 첫 소설.

이 책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각색한 소설이다. 방드르디는 다름 아닌 금요일(Friday)를 뜻하는 프랑스어. 즉, 원작의 충실한 노예 프라이데이가 이 소설에서는 방드르디라는 이름을 가진 원주민으로 나타난다.

자, 여기서 의미심장한 차이가 발생한다. 우선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방드르디라는 이름에서 오는 차이, 그리고 제목이 로빈슨이 아니라 방드르디라는 점에서 오는 차이. 사실상 그 차이가 미셸 투르니에가 디포의 고전을 각색함으로써 얻으려 한 효과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미셸 투르니에는 디포의 로빈슨 이야기가 이미 하나의 소설을 넘어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폭력적 구분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신화로 자리잡았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신화를 뒤틈으로써, 그 폭력적 구분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는 것이다.

책의 중간까지는, 디포의 로빈슨과 거의 똑같다. 다만 로빈슨의 인간적 고뇌, 나태와 타락에의 유혹 등이 부각된다는 점이 다를 뿐, 무인도에 유럽 문명의 조악한 복사본을 건설하려는 로빈슨의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그리고 방드르디(프라이데이)를 구해주고, 대신 그를 자신의 노예로 삼는다. 여기까지는 똑같다.

하지만, 방드르디는 프라이데이가 아니다. 방드르디는 무조건적인 복종과 문화적 주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연한(?) 사고로 섬의 문명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리면서, 로빈슨과 방드르디 사이의 관계는 극적으로 변화한다. 야생 속에서 문명의 삶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뿐이었음을 깨달은 로빈슨은 방드르디를 따라 야생의 삶 속으로 녹아들어가기 시작한 것.

이성과 비이성, 문명과 야만, 정상과 비정상. 이러한 구분들은 그 구분을 행하는 주체(담론의 생산자)의 구분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구분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그러한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그것이 바로 60년대 이후 서구 지성이 몰두했던 주제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주제를 완곡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제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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