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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02 Archives

September 9, 2002

본다는 것의 의미

존 버거 지음/박범수 옮김/동문선/10000원

거의 열흘에 걸쳐 힘들게 읽은 책.

제목 그대로 "본다는 것"을 다룬 책이다. 하지만 그것을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보다, 우리가 겪는 다양한 "봄(looking)"의 행위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봄"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저자가 쓴 글들을 엮어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은 크게 3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첫 장은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구경"하는 것에 대한 의미고찰을 다루고 있다. 두번째 장은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이용하는(찍는 입장에서건, 보는 입장에서건) 행위에 대한 분석과, 몇몇 사진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마지막 장은 "체험된 순간들"이라는 제목 하에, 그가 보아온 여러 미술작품들에 대한 평론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볼 수도 있다"라는 예시라고나 할까?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글이라 읽기도,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미술평론이라는 것이 미술에 기댄 하나의 부가적 영역이 아니라 독자적인 예술영역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 책이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지만, 작품에 종속되지 않고 상상력을 펼쳐나갈 수 있는 능력.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봄"은 그렇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

September 13, 2002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칼 폴라니 지음/홍기빈 옮김/책세상/5900원

'홍기빈 옮김'이라고는 되어있지만 편저 라고 봐야할 듯하다. 칼 폴라니의 사상체계를 개괄하기 위해 그의 저서 일부를 발췌하여 모아놓은 책. 특히 마지막의 해제는 깔끔하게 정리를 해 놓아서, 본문을 읽지않고 해제만 읽어도 좋을 정도다. 오랜만에 보는 의욕적인 역자다.. ^^;

칼 폴라니는 전세계적 자본주의(시장 경제)가 인간과 자연을 파멸로 몰아갈 것이라고 보고, 이를 지역적 계획경제를 통해 극복할 것을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일견 스탈린주의의 일국사회주의론처럼 보이나(실제로 폴라니는 소비에트가 영구혁명을 포기하고 지역 연방 내의 계획경제에 정착한 것을 옹호한다) 많은 부분에서 독자적이다. 폴라니는 전세계적 시장 질서에 반대하는 것과 동시에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도 반대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생산조합과 소비조합이 지역 구성원들의 필요와 욕구를 유기적으로 파악해 생산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이 전제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폴라니는 경제결정론적 시각을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상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볼셰비즘과는 거리를 둔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추진한 전세계적 시장경제 체제 건설에 대항하기 위해 영연방과 소비에트 연방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그 시대 서구 지식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September 18, 2002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지음/정영목 옮김/청미래/8500원

"소피의 세계"가 청소년을 위한 철학소설이라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젊은이들을 위한 철학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그런 목적으로 씌여진 글은 아니다. 작가는 다분히 사변적이라 할 수 있는 태도로 젊은 시기의 "사랑"을 다룰 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사랑"의 모순을 잘 짚어내었다는 점에서, 철학소설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도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왜 이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걸까? 이래서 지식인들은 연애의 적을 넘어서 계급의 적, 국가의 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나보다" 뜨끔했다... -_-;

이 책은 95년에 "로맨스"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판되었던 소설이라고 한다. 아마.. 그 제목이었으면 안 샀을 테니, 제목을 바꿔 출판한 것은 나름대로 성공이라고 해야하나? 영어제목은 "Essays in Love"

September 24, 2002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 지음/유강은 옮김/이후/11000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사태가 일단 진행되기 시작하면 '중립'이란 실질적으론 그 사태를 계속 진행시키는 힘과 다를바 없다는 뜻이다. 기차를 멈추든가, 아니면 계속 달리게 하던가. "침묵은 때론 거짓말이다."라는 격언을 하워드 진은 거듭 상기시킨다.

그는 낙관론자다. 그러나 그의 낙관론은 공허한 이상주의가 아닌, 현실 속에서 부대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읽어낸 미래다. 대개, 현실을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사람들은 비관적이기 쉽다. 매일 아침 신문을 통해 쏟아지는 암울한 소식들(가진 자들이 만들어내는 역사)에 우울해지지 않을 방도가 있겠는가. 하지만 하워드 진은 그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나온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행동이 희망을 만들어낸다.

솔직히 교수랍시고 떵떵거리기나 하는 인간들에게 한 권씩 주면서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김민수 교수 재임용 탈락 사건이나 여타 학내 문제들에 입도 뻥끗할줄 모르는 사이비 지식인들이, 수업시간에는 거만하게 학생들에게 인생을 논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역겹다.

영감을 주는 책.

September 25, 2002

그리고 죽음

짐 크레이스 지음/김석희 옮김/열린책들/8500원

사실, 현대 소설에서 '복선'은 다분히 유치한 소설적 장치가 되어버렸다. 현대의 독자들은 어지간한 복선은 재빨리 발견해 낼 정도로 숙달되어 있어, '식스센스' 정도의 반전을 제시할 자신이 없으면 어설프게 복선을 내밀 생각을 아예 말아야한다. 하지만 복선 없이 어떻게 소설을 구성할까? 미래에 대한 암시가 없다면 독자를 미래로 이끌어갈 동력을 잃어버리는게 아닐까?

이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간을 뒤틀어 서술하는 것이다. 시간을 역행하면 미래를 암시할 필요는 사라진다. 독자는 결과를 보고 과정을 역으로 추리해 들어가야 하며, 소설가는 하나씩 베일을 벗기듯 과거를 그대로 보여주기만 해도 서술의 긴장감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 소설은 그 전형적인 표본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적 측면도 꽤 괜찮다. 소설의 주제는 죽음 그 자체. 살해된 부부의 이야기지만, 범죄 자체는 관심 밖이다. 중요한건 죽음이라는 것, 특히 "인간"의 죽음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과도한 리얼리즘(지나치게 detail한 시체묘사 등)은, 죽음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끔찍한 묘사 싫어하는 사람은 읽지 말 것.

September 28, 2002

진보정당은 비판적 지지를 넘어설 수 있는가

주대환 지음/이후/10000원

이 책의 저자인 주대환 씨는 70년대 학생운동을 거쳐, 80년대의 노동운동 그리고 90년대 초반에는 민중당 운동을 했으며, 현재는 민주노동당 마산합포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 마디로 한국 사회운동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책은 지난 3월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노풍이 불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6월 지방선거 사이에 집필되었으며, 주로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요구하는 주장에 대한 진보정당의 가치와 지향을 옹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다.

새삼스럽게 새로운 내용은 없었지만, 그간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했던 나의 사고를 제대로 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분명한 것은 진보정당은 노무현과 그의 자유주의적 지지자들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이라는 점이다. 아직도 민주노동당과 노무현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가 있다면 읽어보길 권한다.

September 30, 2002

미국 문화의 몰락

모리스 버만 지음/심현식 옮김/황금가지/8000원

미국 문화가 몰락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미국 문화를 싸구려 저급문화로 평가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몰락"의 징후로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상상력이다. 필자는 역사 속에서 하나의 문화가 몰락하는 징후를 크게 4가지(빈부격차의 심화,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한계비용의 증가, 대중의 지적 수준 하락, 정신적 타락)로 나누어 제시하며, 이것이 현재 미국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몰락의 원인은 바로 기업의 문화지배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이라는게 좀 황당하다. 저자는 소위 "수도원식 해결책"이라는걸 제시하는데, 이는 로마 말기의 수도원들이 고대 문헌들을 보관함으로써 이후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중세 암흑시대에 문화보존자로 역할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물론 이들 수도원들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한 일이다. 저자는 오늘날의 경우에도 뜻있는 사람들이 "바람직한" 문화를 보존 지속시킴으로써 문화보존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해법이라 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광범위한 문화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결과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저자는 체제 자체에 대한 어떠한 다른 접근도 배제하고 있다. 조직화된 어떠한 시도들도 결국에는 또 다른 권력을 낳을 따름이라는 식의 사고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문화는 몰락하여 저질 상업문화밖에 남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그저 "좋은 문화"를 잘 보존해 후손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하자는 식의 사고는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엘리트주의적/신계몽주의적/낙관주의적 해법인 셈인데.. 내가 보기엔 별 가망성은 없어보인다. -_-

하지만, "교양"의 실종에 대한 저자의 우려에는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현재의 가볍고 감각적인 문화들에는 무언가 "자기성찰"의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성찰적 자아는 자신을 맞닥뜨리게 되는 "여백"의 순간을 통해 형성되는 법, 빠르고 자극적인 문화에서는 그러한 여백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가장 훌륭한 교양의 도구인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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