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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음악

우연의 음악
- 폴 오스터 지음/황보석 옮김/열린책들/8800원

언제부터인가 폴 오스터의 소설은 내게 "실패하지 않는 선택"이 되었다. 뚜렷한 기호 없이 서점을 서성일 때, 문득 손이 가고 그렇게 사 읽어도 후회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분명 그의 소설은 아주 유머러스하다거나, 혹은 긴장감이 넘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 폴 오스터는 그저 평범하고 약간은 지루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소설이 좋다. 그것은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심지어는 비극적 결말 속에서조차 느껴지는 어떤 따뜻함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따뜻함은 그의 삶의 이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 <빵굽는 타자기>를 읽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폴 오스터의 젊은 시절은 평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선원, 통계 조사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고, 작가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기 전에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로서의 폴 오스터에게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을 이해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주변적 삶 속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쁨에 주목할 줄 안다.

하기에 폴이 그리는 인물들은 대부분 주변적인 삶을 사는 누군가이다. 방황하고 갈등하는 평범한 인물들. 이들의 삶은 너무나 작고 평범하기에 작은 우연에도 그 물줄기가 크게 바뀌곤 한다. 그는 이런 점을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삶에 있어서 맞닥뜨리는 우연들과 선택들,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인간의 의지가 폴의 소설을 특징지우는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연에 의해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운명의 변주곡 속에 인간이 얼마나 진실된 선택을 하는가가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이다. 하지만 손 쓸 수 없는 우연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의지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선택을 하는 인간의 자유와 그 의지에 대한 칭송. 이것이 그의 소설에 '휴머니즘'이라는 칭호를 붙이게 하는 이유이다.

<우연의 음악>은 이러한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방관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날 문득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는 나쉬. 예기치 못한 불행으로 빈털털이에 망신창이가 되어 버린 잭 포지. 이들의 우연한 만남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뒤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저 운명의 손길에 끌려가지는 않는다. 이들은 매 순간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을 해 나간다. 심지어 카드 한 장에 모든 것을 거는 순간조차도, 그런 우연에 모험을 거느냐의 여부는 그들 자신의 판단이다.

길을 가다 진열장 속 TV에서 우연히 정동진의 해돋이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떠나고 싶다는 충동, 밤기차를 잡아타고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충동 자체의 계기는 아주 우연적인 것이지만, 실제로 떠나느냐의 여부는 자신의 판단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는 현실적인 판단을 앞세워 차마 떠나지를 못한다. 그 여행의 결과로 돌아올 부담들, 밀린 일, 깨진 약속, 비용 등이 우리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합리적 판단이며 논리적 사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던가?

그런데 나쉬는 떠난다. 이것이 나쉬와 우리의 차이이며, 이 소설이 주는 카타르시스다. 물려받은 유산 중 일부를 딸의 미래를 위해 적립해 둘 뿐, 마음에 들어하던 직장도, 안정된 생활도 과감히 떨쳐버리고 그는 차를 타고 음악과 함께 떠난다. 물론 동료들과 가족은 그를 말린다. 하지만 그가 선택하는 것은 자유다. 하염없이 뻗어나가는 도로, 머리를 흩날리는 바람, 그리고 음악. 기한도 목적지도 없는 여행. 그래서 무엇이 남느냐는 질문은 너무나도 바보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선택은 자유 자체에 대한 맹목은 아니다. 아마 자유 자체가 선택의 이유였다면, 후에 나쉬가 한 정반대의 선택, 즉 도박에서 진 후, 스스로 노동으로 그 빚을 갚을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유를 포기하는 행위를 설명할 수 없다. 자유는 나쉬에게 있어 삶의 하나의 선택지였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나쉬는 자신이 현재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이었다. 카드 한 장에 모든 것을 걸고, 그 대가를 자신의 노동으로 치루고, 종국에는 자살로 복수를 하는 모든 행위는 그러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가뿐한 인생인가!

만약 나쉬가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을 보고 움직였다면, 그는 결코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유산으로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행복일까? 결과만을 보며 행동하는 사람은 결코 꿈을 꾸지 못한다. 그에게는 단지 예측 가능한 미래가 있을 뿐이다. 직선적인 삶. 하지만 "다른 선택"을 통해 나쉬의 삶은 풍성한 즉흥 연주로 변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그 선택에 얼마나 충실했는가의 여부이지 결과가 아닐 것이다. 악보에 충실한 연주와 즉흥 연주는 각각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때론 삶의 행복이라는 것에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정해진 길, 명예, 성취, 성공... 하지만 그 대가는 언제나 자신의 삶을 옥죄는 것이었다. 넥타이로 목을 졸라매고 편안히 호흡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 상황의 최선은 호흡에 지장을 받지 않는 것...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넥타이 자체를 풀어버리는 것 또한 훌륭한 선택일 수 있지 않을까? 분명 현실적으로 그건 무모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성이 행복이라는 척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 역시 분명해 보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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